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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된장

항생제 없는 시대, 된장은 어떻게 부패를 막았을까?

by sybj-999 2025. 5. 11.

1. 항생제 이전, 부패와의 싸움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다양한 지혜를 활용해 왔다. 현대에는 항생제나 화학적 보존료가 쉽게 사용되지만, 이러한 기술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자연 발효와 염장, 건조 등의 방법을 통해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켰다. 그중에서도 한국 전통 발효식품인 된장은 특히 놀라운 보존력을 자랑하며, 수년 동안 실온에 두어도 상하지 않는 식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된장이 단순히 ‘소금이 많아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된장에는 다양한 미생물 군집이 존재하며, 이들 중 일부는 부패균의 성장을 억제하거나 살균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된장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자연 발효가 만들어낸 생물학적 방어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된장은 봄철에 담가 여름을 지나며 숙성되고, 가을과 겨울을 거쳐 깊은 풍미를 완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유입될 수 있는 부패균이나 병원성 미생물은 다양한 기전을 통해 제거되거나 억제된다. 이는 항생제 없이도 된장이 장기간 보관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다.


항생제 없는 시대, 된장은 어떻게 부패를 막았을까?

2. 고염도 환경이 만드는 첫 번째 방어막

된장이 처음부터 모든 미생물을 허용하는 환경은 아니다. 된장의 기본 재료인 메주를 염수에 담그는 이유는 단지 맛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패균 억제라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병원성 미생물이나 부패균은 고염 환경에서 생존이 어렵다. 일반적인 된장의 염도는 12~18% 수준으로, 이는 상당수의 유해 미생물이 증식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염도는 병원균뿐 아니라 혐기성 독소를 생성하는 클로스트리디움 균(Clostridium spp.)과 같은 강력한 유해균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고염만으로 된장이 안전하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이는 단순한 염장식품이라면 짠맛만 남고, 된장 특유의 풍미와 숙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맛 성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된장의 염도는 발효 미생물에게는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조건이며, 동시에 부패 미생물에게는 치명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선별적 억제 환경’을 조성하는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이 덕분에 된장은 유익한 발효균만이 살아남아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가며, 그 자체로 부패균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3. 고초균과 항균 펩타이드의 생성

된장 발효의 핵심 미생물 중 하나인 **고초균(Bacillus subtilis)**은 된장의 보존력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다. 이 미생물은 발효 초기 메주에서 우점종으로 자리 잡으며, 된장의 단백질을 분해해 아미노산과 펩타이드를 생산할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항균 효과가 있는 바실리신(bacilysin), **서브틸리신(subtilisin)**과 같은 항균 펩타이드를 생성한다. 이러한 펩타이드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병원균이나 부패균의 세포벽을 파괴하거나, 단백질 합성을 억제함으로써 성장을 저해한다.

고초균은 또한 항산화 물질과 면역 조절 물질을 생성하여 인간 건강에도 이로운 작용을 한다. 최근에는 고초균 유래의 항균 펩타이드가 천연 식품 보존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된장이 단순히 '짜서 보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패를 막는 생화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 이런 미생물들의 작용은 자연스럽게 된장을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음식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4. 유산균의 산도 조절 및 병원균 억제

된장 속에서는 고초균뿐 아니라 다양한 유산균도 공존하고 있다. 특히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 류코노스톡(Leuconostoc), 페디오코커스(Pediococcus) 같은 유산균들은 된장의 발효 중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젖산을 생성하여 환경의 pH를 낮춤으로써 부패균이 생존하기 어려운 산성 조건을 조성한다. 병원성 미생물 대부분은 중성 pH에서 가장 활발히 증식하기 때문에, 산도의 하강은 그들의 생장을 크게 억제하는 효과를 낸다.

또한 일부 유산균은 **박테리오신(bacteriocin)**이라는 항균 물질을 생산하기도 한다. 박테리오신은 특정 균종에 선택적으로 작용하여 경쟁균을 제거하는 천연 항생제와 같은 역할을 하며, 식품 안전성 확보에 기여한다. 유산균이 생성하는 젖산과 박테리오신은 된장의 산화방지 효과에도 일조하며, 산패와 부패로부터 된장을 보호하는 이중 방어막을 형성한다. 특히 장기 숙성된 된장일수록 이러한 유산균의 활동이 안정적이며, 감칠맛과 함께 안전성까지 확보되는 특징을 보인다.


5. 곰팡이류의 역할: 효소 제공자이자 경쟁자

된장의 발효에는 곰팡이류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아스페르길루스(Aspergillus oryzae), 무코르(Mucor spp.), 페니실리움(Penicillium spp.)과 같은 곰팡이는 메주 제작 과정에서 공기 중에서 유입되며, 콩의 전분과 단백질을 분해하는 데 필요한 아밀라아제, 프로테아제 등 각종 효소를 분비한다. 이들 효소는 된장의 풍미를 높이는 동시에, 발효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도 한다.

하지만 곰팡이류는 단순한 효소 제공자를 넘어, 병원성 곰팡이의 생장을 억제하는 경쟁자로도 기능한다. 실제로 된장 속의 특정 아스페르길루스 균주는 독소를 생성하는 아플라톡신 생성 곰팡이의 생장을 막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된장이 자연 생태계 내에서 ‘균 간의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복합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곰팡이와 박테리아, 효모, 유산균 등 서로 다른 종류의 미생물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유해균이 침입할 여지를 줄이는 생물학적 장벽을 형성한다.


6. 현대과학이 밝혀낸 전통 지혜의 힘

된장은 단순히 옛사람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보존 기술이 담긴 식문화의 결정체다. 항생제나 화학적 방부제가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된장의 발효 메커니즘을 활용해 수년간 부패 없이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현대 과학의 도구를 통해 그 원리를 점차 밝혀내고 있다. 고초균과 유산균의 항균 펩타이드 생성, 곰팡이의 효소 및 경쟁 기작, 고염과 산도 조절을 통한 생물학적 억제 효과는 모두 자연에서 얻은 생명과학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 된장의 과학적 기반은 앞으로 항생제 대체 소재 개발이나 천연 보존 기술 응용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수 있다. 실제로 세계 여러 국가에서는 된장을 포함한 발효식품의 미생물 생태계와 항균 활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전통 발효 기술의 복원이 주목받고 있다. 결국 된장은 음식 그 이상의 존재이며,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효율적인 생물학적 보존 시스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